115주년 여성의 날·르포

성매매 집결지가 된 희망의 마을…원주 ‘희매촌’을 아시나요?

원주 | 강은 기자
지난 3일 강원도 원주 학성동 성매매 집결지 ‘희매촌’ 골목 / 강은 기자

지난 3일 강원도 원주 학성동 성매매 집결지 ‘희매촌’ 골목 / 강은 기자

“쉿! 아직 주무시는 분도 계세요.”

좁은 골목으로 걸어가던 기록 활동가 신동화씨(35)가 고개를 돌려 속삭였다. 신씨가 들어간 골목 초입엔 ‘청소년 통행 금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몇 걸음을 떼자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통유리 공간이 줄줄이 펼쳐졌다. 지난 3일 오후 3시, 강원도 원주 학성동 일대 성매매 집결지 ‘희매촌’은 고요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언니’들이 잠에서 깨지 않은 시각이었다.

희매촌에서는 낮과 밤의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다른 가게가 문을 닫고 직장인들이 퇴근하는 저녁이 되면 언니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머리가 길거나 짧고, 체형이 통통하거나 말랐으며, 나이대도 다양해 보이는 여성들이 붉은 등 켜진 ‘유리방’에 자리잡는다. 고개를 숙인 중년 남성이 주변을 어슬렁거리거나 차창이 짙어 안을 볼 수 없는 차량이 골목을 서행한다. 이들은 짧은 옷에 10㎝ 넘는 높은 구두를 신고 날이 밝을 때까지 손님을 받는다.

“왜 여기에 ATM 기기가 있는지 아세요?” 영업을 준비하는 업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자 신씨가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오다가 멈칫했다. 그는 골목 입구에 자리한 현금인출기를 가리켰다. “성을 사는 사람들은 흔적을 남기기 싫어하거든요. 혹시라도 걸리면 안 되니까. (매매촌에) 들어가기 전에 돈을 찾아간대요. 가끔 술 취한 손님은 업주한테 카드를 주면서 현금을 뽑아다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는데…업주가 돈을 두 배, 세 배로 받아도 신고를 못 하겠죠.”

성매매 집결지 ‘희매촌’에서 무슨 일이

지난 3일 강원도 원주 원문로 일대에서 성매매 집결지 ‘희매촌’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 인근에는 자동현금인출기(ATM)가 놓여 있다. / 강은 기자

지난 3일 강원도 원주 원문로 일대에서 성매매 집결지 ‘희매촌’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 인근에는 자동현금인출기(ATM)가 놓여 있다. / 강은 기자

신씨는 사진과 주민들의 구술로 희매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바로 옆 동네인 단구동에 살며 틈틈이 카메라를 들고 희매촌을 찾는다. 다니던 회사에서 성추행 피해를 당한 뒤 직장을 그만두고 원주로 이사한 지 10년째다. 지난해 9월에는 ‘로컬플리커’라는 1인 출판사를 만들었다.

희매촌 문제에 관심을 둔 건 2021년부터지만 본격적으로 기록 작업을 시작한 건 지난해 6월부터다. 당시 학성동 성매매 집결지의 한 업소에서 포주 자매가 여성들을 목줄로 묶어두고 동물 배설물을 먹이거나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는 등 1년간 학대했던 사실이 언론을 통해 드러났다. 그는 “자극적인 사건이라 대대적으로 보도됐지만, 관심은 금세 사그라들었다”고 말했다.

2021년 11월 강원도 원주 학성동 희매촌의 한 성매매 업소 내부 모습. 원주시의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되면서 현재 철거된 상태다. / 로컬플리커 제공

2021년 11월 강원도 원주 학성동 희매촌의 한 성매매 업소 내부 모습. 원주시의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되면서 현재 철거된 상태다. / 로컬플리커 제공

희매촌은 옛 원주역 앞 구도심에 형성돼 있다. 1950년 한국전쟁 전후로 실향민이 모여 ‘희망촌’을 이뤘는데, 인근 윤락여성이 모여 살던 ‘매화촌’이 영역을 넓히면서 함께 ‘희매촌’으로 불렸다. 원주 미군기지에 주둔하던 군인들 발길이 끊이지 않아 일대가 호황을 누렸다. 정부는 전국 성매매 집결지 여성들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이들을 방치했다. 성매매 집결지에는 화재나 폭행, 감금 등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희매촌에서 자매포주 감금사건이 발생한 지 9개월이 지났으나 일대 수십 개 성매매 업소는 여전히 영업 중이다. 원주시에 따르면 희매촌에는 총 35개 업소에서 40~50명가량의 여성이 성매매에 종사한다. 희매촌에서 거리상담을 하는 춘천길잡이의집 라태랑 소장은 “건너편 방석집까지 합하면 학성동 일대 업소는 60개가 넘고 인원은 100명 이상”이라고 했다. 원주시는 2019년부터 도시재생을 추진해 지난해 완료할 예정이었으나 업주 반발 등에 부딪혀 사업이 늦어지고 있다.

‘희매촌’ 바로 옆에서 불을 켜다

지난 3일 강원도 원주 학성동 성매매 집결지 ‘희매촌’ 인근에 원주시여성커뮤니티 센터가 불을 밝히고 있다. 신동화씨(35)와 주민들은 한 달에 한 번 이 센터에서 ‘성평등 모임’을 진행한다. / 강은 기자

지난 3일 강원도 원주 학성동 성매매 집결지 ‘희매촌’ 인근에 원주시여성커뮤니티 센터가 불을 밝히고 있다. 신동화씨(35)와 주민들은 한 달에 한 번 이 센터에서 ‘성평등 모임’을 진행한다. / 강은 기자

신씨는 성매매 집결지를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흔적 없이 이곳의 삶이 지워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학성동에서 문화행사가 열린 적이 있어 업소 내부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요. 천장에서 바닥까지 곰팡이가 가득하고 창문도 없고….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닌 거예요. 비슷한 아픔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곳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기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성매매 집결지 특유의 폐쇄성은 기록 작업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신씨는 “종사자나 업주는 물론, 사정을 잘 아는 주민 중에서도 마음을 열고 말해줄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20년간 이 곳에서 활동해온 라 소장도 “희매촌은 업주들 간 조직력이 강해 다른 성매매 집결지보다 폐쇄성이 짙다”면서 “상담을 하러 가도 문을 안 열어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날 밤 라 소장이 희매촌 일대 30여 곳의 유리방을 두드리며 물티슈와 자활 지원 안내 책자를 나눠주고자 했으나 문을 열어주는 여성은 1~2명에 불과했다. 갈색 파마머리에 키가 큰 여성이 미닫이문을 살짝 열고 물티슈를 받자 뒤에서 지켜보던 업주가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물티슈 뚜껑을 열면 자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연락처가 쓰여 있다.

지난 3일 강원도 원주 학성동 성매매 집결지 ‘희매촌’ 인근 원주시여성커뮤니티센터에서 신동화씨(왼쪽)가 성평등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모임에는 최힘찬씨(28)와 손지훈씨(44)가 참석했다. 유리창 너머로는 성매매 업소가 홍등을 밝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 강은 기자

지난 3일 강원도 원주 학성동 성매매 집결지 ‘희매촌’ 인근 원주시여성커뮤니티센터에서 신동화씨(왼쪽)가 성평등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모임에는 최힘찬씨(28)와 손지훈씨(44)가 참석했다. 유리창 너머로는 성매매 업소가 홍등을 밝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 강은 기자

작게나마 변화의 조짐도 보인다. 신씨 활동 이후 희매촌에 대해 이야기하는 주민들이 점점 모이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희매촌 문제 해결을 위한 강연 및 포럼’도 열렸다. 30명 넘는 지역주민이 이 포럼에 참석했다. “우리 지역이지만 모르고 살았던 사실이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냐”고 질문했던 청중들 일부는 한 달에 한 번 ‘성평등 모임’에도 참여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이면서, ‘공간에 불을 밝히는’ 이유가 생겼다. 성매매 업소가 아닌 곳에서 불을 켜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신씨는 말했다. “밤이 되면 약속이라도 하듯 업소 관계자를 빼곤 모두 건물에 불을 끄고 이 근처를 떠나거든요. 밤에 이곳에 불을 켠다는 건 폭력적이진 않지만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이날 밤 희매촌 일대에는 유리방 업소가 밝히는 붉은 빛과 바로 옆 문화공간에서 신씨와 주민들이 밝히는 노란 빛이 동시에 새어나오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강원도 원주복합문화교육센터에서 ‘희매촌 성매매집결지 문제해결을 위한 포럼’이 진행되고 있다. / 로컬플리커 제공

지난해 11월 강원도 원주복합문화교육센터에서 ‘희매촌 성매매집결지 문제해결을 위한 포럼’이 진행되고 있다. / 로컬플리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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