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는 '성 노동자'입니다

페미니즘과 노동권 '회색지대'… '성 노동자' 자활 지원 엇박자 이유는?

입력 2024-02-18 19:30 수정 2024-03-27 15:27
지면 아이콘 지면 2024-02-19 3면

[나는, 우리는 '성 노동자'입니다 ②]
인권 공통 분모 '여성'과 '연대'

엄연한 '불법' 단체들 손길 못내밀어

강압 vs 착취 접근에 거부감 엇박자
묵묵한 투쟁 자그마한 힘 보태기도
"다양한 목소리 더 많이 들려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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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의 성매매 집결지 완전 폐쇄 정책이 추진 중인 연풍3길의 용주골. 2024.2.4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이곳 여성들이 성매매 산업에 발을 디디는 과정과 결과에는 다양한 맥락이 담겨있다. 성매매 집결지 밖의 보편적인 사회에서 결코 누릴 수 없는 안정감과 소속감은 이들이 쉬이 용주골을 떠날 수 없는 요인이다.

삼촌(포주이자 성매매 영업을 하는 남성)’, ‘이모(성매매 집결지 여성들의 방을 치우고 식사를 제공하는 등 숙식을 돕는 노년 여성)’, ‘언니(동료 성매매 종사 여성)’로 이뤄진 ‘불법’에서 파생된 경제 공동체이자 마을은 그간 한국 사회가 미처 보듬지 못한 복지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터전을 형성했다.

“싱글맘인 사람, 공황장애랑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자가 당연하게 생활하는 곳이 용주골이에요. 아가씨들이 힘들어하면 이런 상황을 바로 이해해준다니까요. 어디 일반 회사에 가서 ‘저 공황장애가 왔는데 잠깐 쉬었다 일하겠습니다’고 말하면 납득을 해주겠어요?” 이곳에서 6년째 일하고 있는 A씨는 용주골 ‘성 노동자’들이 마냥 떼를 쓰는 게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여기서 오래도록 살겠다는 게 아니라, 최소한 이곳에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와 논의를 통해 정책을 결정해야 하는데 이 점이 빠졌다”며 “우리는 용주골에 더는 신입 ‘성 노동자’를 받지 않겠다는 조건까지 내걸었다”고 귀띔했다.



결국 ‘성 노동자’임을 공표한 이곳 여성들이 ‘진정으로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 게 맞느냐’, 혹은 ‘본인이 선택해서 성매매를 한 건데 왜 지원을 해줘야 하느냐’의 시비는 부차적인 논쟁이다. 명백한 사실은 숙의 과정 없이 진행된 퇴거 조치에 이곳 여성들은 당장 올해 겨우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게 됐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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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노동권의 회색지대에 머문 용주골 여성들의 싸움에도 연대의 불빛이 켜졌다. 지난달 29일부터 이곳 유리방 한가운데 들어선 농성장에는 시민 2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연대 이유를 들려줬다. 2024.2.6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하지만 엄연히 ‘불법’인 성매매의 특성, 그리고 포주에게 붙잡혀 억지로 성매매를 하는 게 아닌 스스로 ‘성 노동’을 한다는 이곳 여성들의 확고한 신념에 여성단체나 노동단체에서는 선뜻 연대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나마 지자체와 연계해 자활 지원을 돕는 여성단체도 당사자들과 엇박자를 내고 있다. 특히 자활 지원 단체에서 고수하는 고전적인 ‘강압적인 포주 대 착취당하는 집결지 여성’ 구도는 성매매 종사 여성들이 꼽은 거부감을 갖게 하는 접근 방식이다.

여행길을 진행했던 ‘쉬고’ 말고는 용주골 상황에 관여하는 여성단체는 없다. 여기서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면서 현실을 알리고 싶은데, 연락할 방법을 모르겠다. 우리도 여성이자, 노동자다
 용주골에서 6년째 일하는 A씨 

굵직한 시민단체에서조차 나서기 꺼리는 페미니즘과 노동권의 회색지대. 이곳에 머문 용주골 여성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묵묵히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투쟁에 힘을 보태는 자그마한 연대의 불빛이 커졌다. 지난달 29일부터 이곳에는 시민들과 함께 강제 철거에 맞서는 농성장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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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노동권의 회색지대에 머문 용주골 여성들의 싸움에도 연대의 불빛이 켜졌다. 지난달 29일부터 이곳 유리방 한가운데 들어선 농성장에는 시민 2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연대 이유를 들려줬다. 2024.2.6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여기 사람이 살고 있어요’, ‘용주골 사람들도 여성과 시민이다’, ‘우리를 내쫓지 마세요’. 지난 6일 저녁 7시께 찾은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 중간에 자리한 농성장에는 시위 현장에서 흔히 봤던 항의 피켓과 현수막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현재 시민 20여 명이 이곳에서 숙식하며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용역에 대비하고 있다. 이들은 항의 피켓을 만들거나, 이곳 성매매 종사 여성들과 같이 ‘강구바이 카티아와디: 마피아 퀸(2022)’ 등 ‘성 노동권’을 다룬 영화를 감상하면서 일종의 스터디 모임 활동까지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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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 초입에 감시 CCTV를 설치하러 온 공무수행 관계자에 맞서 한 여성이 고압전선이 휘감고 있는 전봇대에 올라갔다. 대치 끝에 CCTV(노란색 바)는 철거됐다. /A씨 제공 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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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파주시에서 성매매 집결지 초입 전봇대에 감시 목적의 CCTV를 설치하러 왔다. 당시 이를 저지하려 이곳 종사자 여성이 고압전선이 흐르는 아파트 3층 높이의 전봇대 위에 올라가 시위했다. 해당 전봇대의 모습. 2024.2.6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농성장 활동에 불씨를 지핀 건 지난달 30일 파주시에서 용주골 초입에 자리한 전봇대 위에 감시 목적의 CCTV를 설치하려 하면서부터다. 당시 이를 저지하려 이곳 종사자 여성이 고압전선이 흐르는 아파트 3층 높이의 전봇대 위에 올라가 시위했다. 시민들까지 항의에 가세하면서 CCTV 설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곳 시민들의 특징은 성매매 종사 여성의 주체성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인천에서 왔다는 은성(활동명·20대 초반)씨는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국가 권력에 의해 삶의 터전, 일터에서 쫓겨나는 걸 보고 ‘이건 잘못됐다’고 느껴 여기로 오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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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부터 이곳에 들어선 농성장에서 활동하는 시민들이 묵는 곳.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종사 여성들이 일할 때 쓰는 장소를 빌려 임시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2024.2.6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그는 “성 노동자 여성은 보편적인 여성에서 배제되는 문제가 많다. 누구의 인권은 챙기고, 누구는 외면하고 이렇게 선 긋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정상적인 여성의 범주를 만드는 것 같다. 전형적인 피해자 프레임 안에만 넣으려 하면 이곳의 여성은 존중받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서울에서 온 현마(활동명·20대 초반)씨는 “성 노동자가 여기 있다. 당신 곁에 살아있다. 성 노동자는 우리의 이웃이다. 친구이자 형제이고 페미니즘이 호명하는 자매들이다”라는 시위 현장에서 본 문구를 읊으며 연대 이유에 대한 답변을 갈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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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노동권의 회색지대에 머문 용주골 여성들의 싸움에도 연대의 불빛이 켜졌다. 지난달 29일부터 이곳에 들어선 농성장에는 시민 2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목사 준태(활동명·33)씨가 이곳에 와 함께 싸우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2024.2.6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일주일에 두 번 농성장을 찾아와 연대해주는 준태(활동명·33) 목사는 “우리 사회 다양한 목소리가 더 많이 들려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일단 이곳의 목소리를 듣는 게 우선이다. 충분히 이야기를 듣고 나서 판단을 내려도 된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곳으로 동료 시민들을 불러모아 활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건 여름(활동명·20대 후반)씨다. 그는 ‘주홍빛 연대 차차’라는 단체를 지난 2019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주홍글씨’로 낙인찍히기 쉬운 성매매 종사 여성을 위한 권리를 고민하며,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

여름씨는 “‘성 노동자’들이 왜 이런 상황을 겪는지 생각해보면 사회에서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혐오’라는 대우를 받으면서 그냥 살던 곳에서 쫓겨난다”며 “이 여성들이 사라지면 그다음은 누가 될까. 그건 또 다른 사회적 약자들이 될 것이다. 어떤 권리도 주장 못 하고 터전과 일자리를 잃는다. 결국 권력에 맞서 인권을 지켜야 하고, (이런 투쟁이)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고 이야기했다.

→3편에서 계속 (여성인권 구실로 짓밟힌 '성 노동자의 인권'… 내쫓기 쉬운 '혐오'에 좌표)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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